일시: 2022년 2월 26일 토요일 17:00
장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좌석: 1층 B블록 4열5
지휘: 피에타리 잉키넨
협연: 바딤 레핀(바이올린)
-프로그램-시벨리우스, 축제풍 안단테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g단조, 작품26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4번 f단조, 작품36
올해 겨울방학 동안 나는 지난날의 내 삶을 돌아보면서
내 지난 날들은 참 툰드라 같았구나... 생명체가 절대 자라날 수 없는 그런 환경, 정말 황량하고
견딜 수 없는 극도의 추위 속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툰드라라는 지형에 빗댄 나의 지난날에 대한 소고는 러시아라는 나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이 때 한창 무대에 오르고 있었던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와
세종문화회관에서 막 개막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 전을 열심히 보러다니며
러시아의 문화와 예술에 대해서도 돌아보았다.
그러던 와중 새 학기를 시작하기 전
혼자서 전세사기에 대응하느라 완전 녹초가 됐던 나는
음악의 기운과 그 힘을 빌리고자 오랜만에 K향의 정기연주회를 예매했는데,
협연자였던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은 바로 러시아 사람이었다.
따라서 수 년만에 보는 K향에 설레기도 했지만,
러시아인 협연자를 보는 데 더 설레며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고,
공연 전 프로그램북을 살피던 중 그가 '시베리아'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공연 프로그램 속 세 곡과 앵콜곡까지 모두
부제로 붙은 '나의 소원은'에 대한 답이 바로 '기쁨'이라는 듯
차분함 속에서도 축제의 신나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곡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바딤 레핀이 협연한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 베스트였다.
나는 원래 조금은 안정적이고 묵직한 첼로나 비올라는 좋아했지만
바이올린은 조금 '째지는' 소리가 난다고 생각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러 협연자를 자세히 볼려고 B구역 앞열로 예매하여 바이올린 소리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는데,
이 날 처음으로 바이올린도 저렇게 부드러운 소리를 낼 수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언뜻 생각하기에 환경이 별로 좋지 않을 것이라 여겨지는 시베리아에서 태어났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쿨에서 최연소로 우승하고 세계적인 연주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바딤 레핀을 보며
문득 '아 차갑고 척박한 곳에서도 저렇게 아름다운 선율이 탄생할 수 있는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러시아는 춥고,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그 안에서 라흐마니노프, 차이콥스키같은 걸출한 음악가들은 물론 발레, 회화, 문학 등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유럽 유수의 나라 중 가장 척박해보이는 그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탄생한 곳이다.
이처럼 비록 내 삶 역시,
너무나 어린 때에 푸르렀던 꽃 밭이 한 순간에 척박한 툰드라로 뒤덮이는 경험을 했을 지라도,
나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기회들을 통해 그 안에서도 몇 송이의 꽃이 피어나게 했음에 스스로를 격려했고,
앞으로는 더 아름다운 초목들을 피워내며 더 풍성하게 가꿔낼 것이란 희망을 품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의 일상에는 음악이 늘 함께하며
항상 고민이 있고 생각이 복잡할 때는 클래식을 듣고, 또 그 가운데서 위로를 받았다.
특히 이번 상반기는 유독 더 그랬었는데,
아마 2022년의 첫 클래식 직관이었던 이 공연이 수많은 메세지를 던져주고 내 마음을 풀어주며
그 문을 성공적으로 열어주어서이지 않았나 싶다.
이 공연에는 또 하나의 직관 포인트가 있었는데,
바로 핀란드 사람인 지휘자 피에타리 잉키넨과, 러시아인 협연자 바딤 레핀의 관계이다.
당시 한창(현재도 진행중이긴 하지만... 전쟁이 빨리 끝나길ㅠ) 러-우 전쟁이 벌어지던 때라
나는 ‘’러시아’하면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공연을 보고난 후 인천에 있는 M양의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서로 적대관계인 것처럼
과거 핀란드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기에 핀란드도 러시아와 적대관계였다는 것이다.
핀란드는 오랫동안 스웨덴 왕국의 영토였는데 러시아가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이기면서
그 전리품으로 핀란드를 지배했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클래식에 대해서는 서로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어서 늘 거의 혼자 삼키곤 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용기를 내어(?) 친구에게 말을 꺼내보니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을 가지고 다른 주제에 이어져 대화를 나누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정말 재미있었다:)
무대에서는 훤칠한 바딤 레핀과 귀여운 잉키넨의 조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사실을 알고 나서 공연을 복기해보니
그 날의 무대가 더욱 더 재미있고 역동적으로 다가왔고 즐겁게 느껴졌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길지라도
알면 알수록, 클래식은 뮤지컬만큼 드라마나 영화만큼 역동적이고 재미있는 분야이다.
거기다 이미 극작가 등이 스토리를 다 구성해 놓은 그 장르들과 다르게
내가 스스로 행간의 의미를 채워갈 수 있는 클래식은 정말로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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