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클래식

2022 교향악 축제 : KBS 교향악단

리베쿤스트 2023. 2. 5. 20:14
일시: 2022년 4월 9일 토요일 17:00
장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좌석: 합창석 G블록 2열 16번
지휘: 마르쿠스 슈텐츠
협연: 카리사 추(바이올린)
-프로그램-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제4번 라장조 K.218

브루크너, 교향곡 제4번 내림마장조 WAB 104 '로맨틱'

 

 

원래 어릴 때 부터 공연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 마자 당시 유행했던 토크 콘서트처럼 강연과 공연을 기획하는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한편

전공은 영문학이었지만 문화예술과 관련된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가 '공연예술의 이해'라는 수업이었는데

그 수업의 교수님은 예술의 전당에서 일하던 분이셨고,

개강이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화창한 봄날, 그 수업의 수강생들에게 '교향악 축제' 티켓을 뿌리셨다.

물론 그 공연을 보고 감상문을 적는 것이 과제이긴 했지만

당시 나는 '와 이렇게 공짜 티켓도 받고 음악도 감상하는 과제라면 이건 백 개라도 하겠다'라고 생각했다.

보통의 이런 공짜표를 받으면 어디 이상한 '쩌리 자리'에 앉기 마련인데,

당시 자리도 꽤 좋았고, 그 날의 곡도 정말 좋았고,

또 공연을 보고 나온 뒤 콘서트홀 앞에 펼쳐진 음악분수의 감미로움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나와 교향악 축제의 첫 만남 이었고,

나는 그 날의 아름다움에 반해 교향악 축제의 팬이 되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을 떠나게 되고 오랜 수험생활을 거치며

연례행사처럼 맞이하던 교향악 축제는 나에게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KBS 교향악단의 연주를 본 이 날 역시도, 원래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보려고 했었는데

내가 사랑하는 박은태 배우가 코로나에 확진되어 캐스팅이 변경되었고

'박은태 아니면 의미없지'라는 생각에 미련 없이 표를 놓고 다른 공연을 찾아보던 나의 레이다망에 이 교향악 축제가 포착되었다.

 

약 10년 만에 다시 만난 교향악 축제:)

4월 13일에 본격적인 이사를 앞두고 그간의 맘고생과 몸고생으로 인해

당시 나는 극도로 지쳐있었기에 비록 뮤지컬은 취소되었지만 공연을 포기할 수 없었고,

마침 2월에 깊은 인상을 남겼던 K향이기에 망설임 없이 예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교향악 축제 중 서울시향, 강남심포니와 더불어 K향은 미리부터 매진이 되어

자리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하지만 그 와중에 줍줍 티켓팅 성공으로 '합창석'을 구할 수 있었다.

그동안 발레나 오페라, 뮤지컬 등을 보는데 익숙해선지

뭔가 무대는 항상 '정면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고

단원들을 뒤에서 보는 합창석은 나에게 뭔가 어색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 날의 공연은 나에게 '합창석의 재발견'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싸고 재밌는 합창석! 이라더니... 합창석의 재발견:)

프로그램 중 첫 번째 곡은 바이올린 협주곡이었고,

지난 2월 K향에 바딤 레핀의 협연으로 인해

조금은 바이올린과 화해했지만 아직 그 째지는 소리를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합창석에 앉으니 협연자의 소리가 좀 멀게 느껴졌고,

모차르트의 바협은 곡 자체가 현악 위주로 구성된 곡이었는데 음이 굉장히 부드럽게 들렸다.

당시 13일이 이사였기에 그 날 하루는 교사에게 잘 허락되지 않은

무려 연가를 써야해서 그 주에 일을 몰아서 하느라 힘들었는데

현의 부드러움으로 그 힘듦이 모두 위로가 되는 느낌이었다.

 

이제 나도 바협을 좋아할 수 있을까?!:)

한편 두 번째 프로그램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그 중에서도 그가 직접 '로맨틱'이라고 부제를 붙인 4번이었다.

비록 브루크너가 베토벤과 말러를 잇는 교향곡의 대가라고는 하나

한 번도 진지하게 그의 곡을 완독한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1시간이 넘어가는 그 길이에 기함했고, 아 이건 수면 각인가? 싶었다.

또한 부제가 '로맨틱'이라고 하는게 딱히 뭐 그렇게 느껴지지도 않아서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내 자리는 어디? 바로 합창석이었다!

그래서 일단 바로 밑에 팀파니랑 금관이 쿵쿵 하니까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ㅋㅋ

왼편에 자리하던 더블베이스도 그렇게 열정적인 악기인지 몰랐는데

바로 뒤에 트럼펫 등의 금관 소리와 합쳐져서 그런지 엄청나게 힘있고 멋있었다.

그래서 1시간 내내 곡에 집중할 수 있었고, 자리 덕분에라도 너무 재미있어서

잠이 올래야 올 수가 없었다.

또 내 자리는 합창석 중에서도 정중앙이라 지휘자가 바로 마주보이는 자리였다.

공연을 보면서 항상 지휘자의 뒷모습만 봤지, 그를 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는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일단 단원들의 뒷모습, 그리고 보면대 위에 펼쳐진 악보를 보니

나도 같이 단원이 된 것만 같았다.

또한 예전에 초등학교 때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며

당시 음악에 열정적이셨던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지휘를 잠깐 배운 적이 있는데

그 때 수준에서 내가 배운 지휘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초딩 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하지만 지휘란 이게 다가 아니었고,

그 역동적인 모습에 뮤지컬 캐스팅이 바껴서 안 보게 된 것이 신의 한 수라고 느껴졌을 만큼

지휘자의 몸짓이,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뮤지컬보다 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선지 유튜브로 이 곡을 들었을 때는 별로 와닿지도 않고

이 정도의 교향곡은 아직 나에게 무리인가? 싶었지만 이 날의 공연이 너무 마음에 남아서

이는 한 동안 나의 새벽 출근길을 밝히는 출근곡이 되어 주었다.

실제로 브루크너의 교향곡 4번 로맨틱은

4개 악장 각각마다 짤막한 설명이 붙어있는데 그 중 1악장은

날이 밝아오는 새벽, 중세 도시의 탑에서 아침을 깨우는 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고, 기사들은 기운차게 말을 타고 밖으로 향한다.

자연의 신비가 그들을 둘러싼다.

새들의 노래, 바람에 떨리는 나뭇잎 소리,

그리고 시냇물의 소리, 그렇게 낭만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이런 스토리를 담고 있고, 이것은 뭔가 절묘하게

매일 새벽 4시반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새벽공기를 가르고 집을 나서는

나의 상황과 맞물려 나의 출근길을 '로맨틱'하게 만들어주었다♥️

 

전지적 합창석 시점

브루크너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흥미와 재능을 보였지만

교사로 일하다가 40대가 되어서야 본격 작곡의 길에 들어서게 되고 50대가 되어서야 주목받았다고 한다.

이는 묘하게, (이제는 교사로서의 내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또 확실해졌지만)

지난 봄까지만 해도 6년차의 매너리즘에 빠져선지

여러 진로고민을 안은 채 '이 길이 나의 길인가?'도 고민하던 나와 겹쳐서

프로그램 속 작곡가의 삶 측면에서도 나에게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작년에는 무슨 바람이 불어선지 (아마 영어 학습지 광고를 찍으면서...)

'나중에 라이센스 뮤지컬의 대본 번역과 배우 통역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던 인터뷰 때문에

뮤지컬을 엄청나게 보러 다녔었는데

역시나 적어도 나에게는 뮤지컬이 클래식을 이길 수 없다.

합창석의 재발견, 교향악 축제를 사랑했던 대학 시절 나의 재발견,

바이올린 협주곡의 재발견, 브루크너의 재발견...

나의 봄날을 너무나 풍성하게 장식해준 교향악 축제였다.🌷

벌써부터 이를 다시 만날 내년 봄이 기다려진다.

 

유튜브 생중계로 방구석 1열에서도 시청 가능한 교향악 축제:) 덕분에 이사 후 외로운 마음을 많이 위로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