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발레

국립발레단, <호두까기 인형> - '화려함' 뒤에 감춰진 진한 '그리움'

리베쿤스트 2023. 2. 7. 15:30
일시: 2022년 12월 20일 화요일 19:30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좌석: 1층 B블록 2열 8번
원작: E.T.A. 호프만
음악: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안무: 유리 그리고비치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선지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났던 예당 오페라하우스:D

독일 작품 <호두까기인형과 생쥐왕>을 원작으로 하는 호두까기 인형은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극 전반에 흐르기에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와 더불어 '차콥 발레 3대장'이기도 하고

또 연말마다 국발과 유발이 매년 올리는 레퍼토리인 만큼

클래식계에서는 '합창', 오페라계에서는 '박쥐'와 더불어 '연말 공연 3대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어릴 때 외할머니를 통해 처음 접한 발레의 세계에서

내가 가장 처음 접했던 것이라 늘 볼 때마다 아련한 기분에 빠지게 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지난 몇년간은 코로나로 인해 공연장에 잘 가지 못했고,

3년 전 유니버설 발레단의 호두까기를 본 이후로 오랜만에 만나게 된 호두였다.

따라서 미리 일찌감치 표를 예매해두고 공연 날짜만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격리가 딱 공연 전주에 끝나 무사히 공연을 보러 갔다.

(2년 전 학급 학생의 확진으로 2주간 쌩격리를 하느라 여러 공연을 놓쳤던걸 생각하면... 기적이다!)

그리고 나의 코로나 완치를 축하하기라도 하듯,

예술의전당의 시스템이 발전해 모바일티켓 입장이 가능했는데

모바일티켓 소지자에게는 선물도 증정해주어 공연 전부터 기분이 좋았다.

(마침 여행에 유용한 네임택과 여러가지를 받았던 것 같다.)

 

모바일티켓

일단 나 자신부터가 단순히 예쁜 것, 귀여운 것만 좋아하던 꼬꼬마시절에

'호두'로 발레에 입문하며 화려하고 귀여운 무대와 춤에 눈을 떼지 못했을 만큼

이 작품은 단순히 '어린이를 위한 발레', '예쁘고 아기자기한 작품'으로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음악가인 차이콥스키나 안무가인 마리우스 프티파 둘 다의

누구보다도 진한 그리움과 슬픔이 서려있는 작품이다.

먼저 차이콥스키는 1876년 백조의 호수, 1880년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음악을 제작하고

1892년에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호두의 음악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다 그 도중 여동생 알렉산드라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충격으로 작곡도 잠시 중단한다.

그래서 호두의 곡 중 대부분의 곡들이 밝고 아기자기하지만

2막의 파드되는 차콥이 그의 여동생을 떠올리며 쓴 곡이기에

그 어느 곡들보다 아름답지만, 우울하고 하강하는 음계가 바이올린의 연주로 등장한다.

한편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 역시 이 작품의 안무를 제작하던 도중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둘째 딸 에브게니아가 사망한다.

그래서 그는 그 슬픔과 건강악화로 조수인 이바노프에게 안무를 넘기게 된다.

그는 그 후 정원을 산책하던 도중 '금잔화'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를 딸이 떠난 후 피어난 꽃이라 생각해 2막 꽃의 왈츠의 꽃을 금잔화로 설정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 호두까기 인형의 여러 버전
안무보다 스토리 구조적으로 호두까기 인형의 여러 버전을 살펴보면 현재 세 버전의 호두까기 인형이 존재한다.
위 이야기에 등장하는 러시아의 전설적인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가 바톤을 넘긴 이바노프에 의해
1892년에 제작된 러시아 황실발레는 1919년 고르스키에 의해 제국 볼쇼이 발레로 이어지고
이를 1954년 발란신이 뉴욕시티 발레로 계승한다.

이외 1934년 바이노넨의 마린스키 발레, 1966년 그리고로비치의 볼쇼이 발레가 있다.
참고로 유발은 마린스키 버전을, 국발은 글 서두에 소개된 것처럼 그리고로비치의 볼쇼이 버전을 따른다.

 

3년 전 봤던 유발 버전 호두! 이때 신동엽 딸이 주인공 클라라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신동엽 아내분 옆자리에서 봤다ㅎㅎ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나에게 호두는 그동안 늘 '예쁘고 좋기만' 한 작품이었으나

이 날은 왠지 화려한 파드 되를 보면서도, 희망찬 꽃의 왈츠를 들으면서도

귓가에 들리는 음악과 눈에 보이는 안무가 왠지 모르게 슬프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이제는 세상에 계시지 않는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호두를 3년만에 봤고, 달라진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와 달리 이제는 나도 차콥이나 프티파가 느꼈을

진한 그리움이 맘속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연말의 호두인만큼, 많은 아이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삼삼오오 왔는데

그 모습에서 어린 시절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공연을 다니던

하지만 이제 다시는 재연시킬 수 없는 내 모습이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하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께서 '난쏘공'을 읽고 있던 나에게

'이 작품을 꼭 고등학교에 가서도 한 번, 대학교에 가서도 한 번,

그리고 더 나이가 들어서도 한 번 읽어보라'고 하셨었다.

그러면 그 때 마다 여기서 느껴지는 것이 다를 것이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여러 책을 읽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는

그런 경험을 종종 하며 신기했었는데

영원히 나에게 '환상 속 동화나라'일 것만 같았던 '호두'에서

그 화려함 뒤에 감춰진 짙은 그리움을 엿보게 되었던

집으로 가는 길,

'이렇게 어른이 되어간다'는 어느 구절이 문득 떠오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