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클래식

이안 보스트리지, 겨울나그네

리베쿤스트 2023. 2. 7. 10:50
일시: 2022년 12월 1일
장소: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
좌석: 1층 B열 21번
이안 보스트리지
피아노: 줄리어스 드레이크
-프로그램-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1-24

 

0.

대전예술의전당 B구역 21번 시야

부쩍 날씨가 쌀쌀해진 12월의 첫 날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로 시작했다. 

마치 수능이 끝난 고3마냥, 수능 이후 갑자기 삶에 깃든 여유와 무료함이 혼동되던 나는

우연히 대전예술의전당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이 공연을 발견했다.

롯데콘서트홀의 일정을 통해 이안 보스트리지가 내한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대전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슈베르트의 그 유명한 연가곡집 <겨울나그네>를 그의 영혼의 단짝 줄리어스 드레이크와 함께 완곡한다는 것은 보기 힘든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대전예당 회원음악회로 70% 할인되는 금액에 

늦게 표를 구했음에도 취소표의 은혜로 앞열 중앙을 예매한 나는 퇴근 후 대전예당으로 향했다.

1.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

우리가 흔히 '겨울 나그네'라고 부르는 이 곡은, 엄밀히 말하면 겨울 '나그네'가 아니다.

독일어 원제목이 'Winterreise'인데, 

'Winter'는 누구라도 그 뜻을 추측할 수 있듯 '겨울'이 맞지만

그 뒤에 붙은 'reise'는 '나그네'가 아닌 '여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곡은 엄밀히 말하면 '겨울 여행'인데 

가을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있던 날씨가 갑자기 매서운 겨울로 바뀐 이 주에,

대전예당에서 회원음악회로 이런 공연을 열어주어 

12월의 첫 날 부터 '겨울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겨울나그네>는 언뜻 하나의 가곡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빌헬름 뮐러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집'이다. 

총 24개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실연당한 주인공이 겨울에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며 느끼는 감정을 주로 노래한다. 

이 곡은 내 인생에 세 번 다가왔는데

일단은 고등학교 때 각종 독어 가사를 한글로 번역해보며 독일어로,

그리고 중학교 음악시간에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5번 보리수를 한국어로,

가장 처음은 산에 다녀오시던 외할아버지의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던 선율과

흥얼거리시던 멜로디로 접할 수 있었다.

2. 이안 보스트리지

좌 줄리어스 드레이크, 우 이안 보스트리지 ​

이안 보스트리지는 원래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역사학과 철학을 전공한 인문학도로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만난 피셔 디스카우에게 약 3년간 레슨을 받은 후 성악가로 데뷔했다고 한다.

전공자가 아닌데도 음악을 사랑하고 그에 조예가 깊었던 것 뿐만 아니라

키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의 이안 보스트리지의 모습을 통해 

그 시간내내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본업에서 정년 때 까지 열성적으로 근무하시던 외할아버지는

은퇴 후 선산을 돌보시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으셨다.

그래서 나와 외할머니가 성당도 가고, '동네 한 바퀴'를 하러 아침마다 집을 나서면

외할아버지께서도 산으로 출발하시곤 하셨는데

우리가 먼저 집에 와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으면 외할아버지는 거의 매일 

낡은 휴대용 카세트에서 나즈막히 흘러나오는 이 곡과 함께 들어오셨다.

그래선지 종종 점심 때 까지 집안에 <겨울 나그네>가 울려퍼진 적이 많았는데

그 때 외할아버지께 '외할부지, 이 노래는 엄~청 길어요, 가수가 부르느라 힘들겠다'

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 때 할아버지는 웃으시며, 사실 이 노래는 24개의 곡을 하나로 묶은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당시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우와 24절까지 있는 노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3. 시네마 천국

시네마천국

내 인생 영화는 <시네마 천국>이다.

어린 토토가 알프레도와 동네를 돌아다닐 땐 외할머니와의 추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짓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중년이 된 토토가 알프레도의 장례식을 마치고

그가 남긴 필름을 보며 눈물이 맺히던 때는,

나 역시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외할머니가 주섬주섬 꺼내 보여주셨던

외할아버지의 수첩에 꽂혀있던 내 어린 시절 증명사진을 봤던 순간이 떠올라 눈물 짓게 된다. 

점심 내내 울려퍼지던 겨울나그네가 끝나고 외할머니께서 부엌일을 하러 가시면

외할아버지와 나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나는 점심을 먹고는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공주 퍼즐 맞추기 놀이를 했는데 

그 때 외할아버지께서는 방 한 켠에 놓인 커다란 책상에 앉아 현업에 계실 때처럼 주판을 두드리시곤 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얼마간 동안은 '외할부지는 나랑 잘 안 놀아 주신다, 나랑 놀기 싫으신가 보다'

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하지만 사실 할아버지께서는 냉정하게 주판만 맞추신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일이 끝나시면 바닥에 앉아 퍼즐을 맞추고 있던 내 곁에 오셔서

곱게 쌓인 전단지를 접어 내가 인형놀이와 소꿉놀이에 쓸 종이 바구니를 만들어주셨다.

그리고 외할머니께서 부엌일을 마치고 나오셔서 나와 함께 있어주시면

밖으로 나가 사탕 큰 봉지를 사오셔서는 내가 좋아하는 맛들로 그 바구니를 채워주시곤 하셨다.

좀처럼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으시고, 어린 아이가 느끼기에 조금은 무뚝뚝한 외할아버지셨는데

어느새 나도 잊어버리고 그다지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내 어린 시절을

오래도록 간직하시고 항상 추억하셨다는 외할머니의 말씀은,

당시 사랑은 무조건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어떤 사랑은 너무나 커서 겨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4. 슈베르트

<겨울나그네>는 사랑에 실패한 청년이 추운 겨울 연인의 집 앞에서 이별을 고하고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들판으로 방랑의 길을 떠나며 부르는 노래이다.

슈베르트는 이를 작곡하기 4년 전 같은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연작 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집 아가씨>를 작곡했다.

<아름다운 물방앗간집 아가씨>는 청춘의 서정과 아름다움이 듬뿍 담긴 작품이었지만

<겨울 나그네>는 음울하고 어두운 정조가 가득한 비극적인 노래이다.

그는 다가올 죽음을 예감한 듯 가난에 시달리며 고독한 삶을 살고 있었고,

<겨울 나그네>를 완성한 이듬해에 가난과 병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 공연을 보기 전 며칠전에 만난 베토벤이 

그 강인함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어둠을 다 몰아내고 극복했다면

슈베르트는 역시나 조금은 유약해서 

어둠 속에서 한 없이 우울해하고 나약해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이 그 선율 속에 녹아있다.

그래서 나는 슈베르트를 별로 안 좋아했었다.

하지만 최근에 읽은 책에서 '(나에게) 사랑을 주는 방식'에 대하여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장점을 찾아내어 사랑해주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외면하고 미워해왔던 성격의 일부를 직면하는 일이다'라고 말하는 문구를 보았다.

5. 

어떻게보면 베토벤도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무조건 시련과 불운을 외면하고 좋은점만을 보려고 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온전히 마주하고 받아들였기에 그런 승리의 노래를 쓸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보면 슈베르트 역시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온전히 직면하고

그걸 그대로 풀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강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랑은 너무나 커서 표현되지 못할 수도 있고,

또 어떤 강인함은 정말로 강해서 자신의 연약한 모습만을 있는 그대로 내보인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한없이 다르게 다가오는, 내가 알던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요즘이다.

나름 회원음악회라고 선물을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었다. 오페라글라스, 그리고 실황음악이 담겨진 USB, 골프우산! 타 지자체에 비해 좋은 공연을 저렴하게 보는것도 좋은데… 대전예당 정말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