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2년 11월 29일 화요일 19:30
장소: 예술의전당
좌석: 2층 E블록 3열 5번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지휘: 크리스티안 틸레만
-프로그램-베토벤, 교향곡 제5번 C단조 '운명', Op.67
브람스, 교향곡 제2번 D장조 Op.73
이 공연은 단지 '운명 교향곡' 을 듣기 위해 갔다.
베토벤의 다섯번째 교향곡이자,
'빠바바밤~'하는 도입부로 아마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을 이 곡은
원래는 그냥 단순히 5번 교향곡일 뿐이었으나
훗날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하고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라고 말했다는 것에 착안해
'운명 교향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베토벤의 여러 교향곡들 중에서도 이 곡을 특히 좋아하셨는데
그래선지 어릴적 외가댁에서 놀고 있으면 종종 이 곡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도입부부터 놀랐고
'외할부지, 천둥 치는 것 같아요, 너무 무서워요!' 하면서 이 곡이 시작하자 마자 울곤 했다.
그럴 때 마다 외할아버지는 나긋이 웃으시며 LP를 교체하시곤 했는데
그래서 이 곡은 나에게 매우 익숙하지만 끝까지 들은 적은 손에 꼽는 곡이 되었다.
좀 더 자란 후에도 이 곡에 대한 나의 거부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곡의 이름이 '운명' 이어선지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도입부는 거대한 '운명'이 인생에 지진을 일으키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고
그 후에 이어지는 선율은 그 운명이 무서워 도망가고, 그 운명에 결국은 굴복하게 되는
나약하고 비극적인 인간을 그리는 듯 했다.
이는 예습 영상으로 택했던 정마에와 카라얀 버전에서도 여실히 드러났고,
곡의 웅장함에는 감탄이 나왔지만 곡이 묘사하는 상황은 나를 울적하게 했다.
그러나,
이날 틸레만의 지휘봉 아래서 연주되는 이 곡은 확연히 달랐다.
그와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는 시종일관 곡을 유연하고 부드럽게 이끌어갔는데
그래선지 운명교향곡의 그 유명한 도입부가 여느 때 처럼
우르릉 쾅쾅 울리는 '천둥 소리'라기 보다는
베토벤이 이야기 했던 것처럼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다가왔다.
베토벤이 이 곡을 쓸 당시 베토벤의 문을 두드리던 운명은 그리 호의적인 운명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이 곡을 쓰던 즈음인 1808년은 그에게 끔찍한 한 해 였다고 한다.
나날이 심각해지던 귓병은 그에게 닥칠 청각상실을 예고했고,
조국은 나폴레옹 황제에게 짓밟히고 있었으며,
그의 사랑하는 동생은 천박한 여성과 결혼하고, 금전마저 바닥나며
모든 것이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인내하고 극복했다.
아무리 운명이 그를 세차게 흔들었을지라도 말이다.
운명이 그의 인생 전체를 다 부셔버릴듯이 잡아채고 흔들어댔지만
그는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고 단단히 버틴 것이다.
그래선지 어린 시절에는 무서워서 울고, 그리고 좀 더 커서는 왠지 거부감이 들었던 1악장의 멜로디가,
베토벤이 절대 그 문을 열어주지 않자 별 방법을 다 써서라도 집으로 들어오려고
호들갑 떨며 분주해하는 '나약한 운명'을 묘사한 것처럼 느껴져서 실소가 나기도 했다.
한편 이어지는 2-4악장은 그 악장들 전체가 베토벤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나아가는 '행진곡'처럼 들렸다.
2악장은 'Andante con moto(느리지 않고 생기있게)'라는 빠르기말에 걸맞게
운명을 견디고 이겨낸 베토벤이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다시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그리고 3악장은 'Scherzo, Allegro(빠르게)'로 조금 더 힘차고 대담하게 발을 내딛는 모습을,
마지막 4악장은 'Allegro'이면서 더 웅장해지는 멜로디로 완전히 당당해진 발걸음을 묘사하며
그의 완전한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凱旋)행진곡인 것만 같았다.
이 날에 이르러서야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은 드디어 내게
세찬 운명에도 버티는 강인한 인간, 승리하는 인간을 묘사하는 곡으로 다가온 것이다.
몇 달 전부터 언론에서는
바렌보임과 함께 베를린 슈타츠카페렐가 450년만에 최초로 내한을 한다고,
그것도 브람스 교향곡 1-4곡 전곡을 연주할 것이라며 대대적으로 광고를 했다.
하지만 당시 내 입장에서 바렌보임은 어차피 베를린필 신년음악회에서 볼거고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의 <백조의 호수>로 만날 예정이었기에,
또 '가을엔 브람스'라고 하지만 브람스가 딱히 땡기지는 않아 관심이 없었던 공연이었다.
하지만 어떤분을 통해 29일 공연은 신세계그룹의 초대로 열리는데,
이때는 브람스 교향곡 2번과 더불어 베토벤 교향곡 5번이 연주된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거기다 바렌보임의 건강 악화로 지휘자가 틸레만으로 바뀌었고,
틸레만도 부상이 있어 온다 못온다 말이 많았지만 그는 결국 오게되었다.
틸레만은 2019년 빈필 신년음악회에서 보고 '와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에 드레스덴의 합창에서 만나기를 고대했으나 불발된 지휘자이기에 더 고민이 됐는데,
원래 나는 구할 수 없는 표였지만 좋은 기회를 통해 표를 구하게 되었다.
그 덕에 옆자리서 나란히 관람하게 된 분과 인터미션 때 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더욱 풍성한 시간을 보냈고 훗날 틸레만도,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도 다시 보고싶어졌다.
하지만 이 날 내가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은 외할아버지였다.
이제 나도 드디어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듣고도 무서워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으니
더이상 외할아버지의 음악감상을 첫머리서부터 끊지 않고
그냥 그 곁에 앉아 끝까지 이 곡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소리가 나면, 그냥 외할아버지 옆에 가서 그 손을 꼭 잡으면 될 뿐이다.
'음악'은 남았지만 '사람'은 가버린 운명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걸 또 바꿔 생각하면 '사람'은 갔지만 '음악'이 남아 추억할 수 있음이 감사하기도 했다.
앞으로 내 앞에 어떤 운명이 다가오더라도
이날 새롭게 다가온 이 곡을 기억하며
나에게 다가오는 운명에 승리하는 삶을 살 것이다.
카라얀이나 정마에가 '극적인' 지휘를 하는데 반해
이날 본 틸레만은 이 영상 속 블롬슈테트와 더 가까웠다.
부드럽고 유연한 운명 교향곡이 참 새로웠고, 또 좋았다.
2019년 빈필 신년음악회에서 세상 심각해보이던 분이
'Die Wiener Philharmoniker und ich wünschen Ihnen,'Prosit Neujahr!'
라고 새해인사를 할 때 개구져하던 표정이 괜히 나온게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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