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르 레비트 피아노 리사이틀
일시: 2022년 11월 15일 화요일 19:30
장소: 예술의전당
좌석: 2층 BOX5 2번
-프로그램-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피아노 소나타 25번 '뻐꾸기'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
이고르 레빗을 처음 만난 것은 바로 이 기사에서 였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6161510028790
무대를 잃은 음악가가 외치는 침묵의 비명
이고르 레빗(Igor Levit) 유튜브 캡처잔혹한 리사이틀이었다. 피아노 앞에서 고독과 사투를 벌이는 연주는 16시간이나 지속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주자가 느끼는 감정과 체력의 기복이 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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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모든 삶이 멈추고 사람들이 괴로워하던 시기에,
예술로 그 고통을 승화시킨 예술가라니.
요즘 세대에 참 귀감이 되는 연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이번 겨울방학 때 여행을 계획하면서
갑자기 일정이 변경된 덕분에 라이프치이에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공연의 협연자가 이고르 레빗이기에 망설임 없이 표를 구했다.
때문에 그의 내한 리사이틀이 반갑긴 했지만,
어차피 독일에서 볼건데 패스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주는 수능주간인 덕분에
주초에 온라인클래스에 들어가게 되었고, 나는 감독을 맡지 않게 된 덕에 주 후반까지 여유가 생겼다.
거기다 더 결정적으로는,
지난 20년동안 '피아노를 다시 하고 싶다'고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던걸
이번달부터 현실로 실현시키게 되었는데,
열 세살 때 그만 뒀던 바로 그 지점 그대로, 베토벤 소나타를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베토벤 소나타가 프로그램 전반에 흐르는 이 공연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공연이었고,
'가을방학' 기간 중 '화-수'는 서울로 행선지를 정해 레빗을 만나러 떠났다.
프로그램은 템페스트와 비창, 그리고 인터미션 후 뻐꾸기와 발트슈타인이었는데
각 소나타가 작곡되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인터미션을 전후로 베토벤의 힘들었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작품들과
그가 힘듦을 극복하고 조금은 밝은 에너지를 담아냈던 작품들로 나눈 것 같았다.
연초에 봤던 짐머만이나 캉토로프의 리사이틀은 평이 거의 비슷했던 반면,
이번 레빗의 공연은 각 사람마다 평이 판이하게 갈리는 듯 싶었는데
적어도 나에게는 아래 세 가지 포인트로 인해 굉장히 의미있고 재미있는 연주였다.
1. 자리
원래도 박스석은 예당에서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좌석이라고 생각해 선호했는데,
리사이틀 때는 '연주자를 가까이서 보겠다!'라는 신념 하나로
한 번도 박스석에 앉아본 적은 없고 1층 앞쪽 어딘가에 자리를 잡곤 했다.
하지만 이날 처음으로 예당의 BOX 5번에 앉아봤는데,
이 자리 덕분에 귀로는 레빗의 연주를,
그리고 눈으로는 레빗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 끝까지 감상할 수 있었다.
일단 레빗은 '지휘하듯이' 연주를 했다.
보통의 연주자들은 곡에서 왼손이나 오른손이 쉴 때 그 손을 건반위에 올려놓거나 가만히 내려놓곤 한다.
하지만 레빗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피아노에게 사인을 주듯이
쉬고있는 손을 지휘자처럼 움직였는데, 단순히 '이건 그의 습관인가?' 싶기도 했지만
마지막 곡 발트슈타인에서 '여리게' 부분이 나올 때
피아노를 상대로 '쉿' 하는 모습을 통해서 내 추측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를 마치 자신의 손 아래 있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동료로 생각하는 듯 했는데
그래서 그 모습이 정말 재미있고 또 인상깊었다.
2. 발소리
이 역시 1번의 자리와 이어지는 맥락으로
연주자의 리사이틀을 위에서 내려다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페달링을 관찰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와중에 레빗은 손놀림 뿐만 아니라 발놀림도 매우 인상깊었는데,
단순히 페달을 누르고 떼는 것 뿐만 아니라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춤 추는 듯한 모습을 연출해 주었다.
거기다 그가 신은 구두까지 한 몫 하여
구두가 무대 바닥과 부딪힐 때 마다 마치 탭댄스 리듬이 더해지는 듯 했다.
음원을 들으면 악기 소리 이외의 소리들은 다 사라지기에 우리는 깨끗한 연주만 감상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연주자가 내는 다양한 소리까지 함께 들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공연을 보러 오는 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비록 연주자 한 명과 악기 한 대가 무대에 오르는 리사이틀이지만
레빗의 연주 스타일과 구두 덕분에, 마치 배경음을 깔아주는 오케스트라가 있는 마냥,
혹은 연주자 옆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가 있는 마냥 상상하게 해줘 재미있는 공연이었다.
3. 악보
이날 공연을 보기 전 특별한 곳에 들렸는데 바로 예당 비타민스테이션에 위치한 '대한음악사'이다.
피아노학원 선생님과의 협의(?) 끝에 내 첫곡은 베토멘의 '비창'으로 정해졌는데
대충 인터넷에서 악보를 찾아 뽑아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제 정식으로 다시 배우게 됐으니 제대로 된 악보를 사고 싶었다.
여기저기서 '헨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또 이날 시간이 촉박하기도 해서
어차피 헨레 살거, 그냥 인터넷 주문이나 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참 직접 가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냐면 서점 한 켠을 꽉 채우고 있는 악보들을 보자마자 정말 두근두근 했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했고,
혹시 전공을 하게 된다면 피아노 말고 다른 악기도 해야한다고 들어서 플룻까지 배웠을 정도로
음악은 참 끝까지 하고 싶은 분야였다.
하지만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학업을 핑계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그만두게 되었는데,
이후 대학생 때나 초년생 때 뉴에이지 등 쉬운 곡 혹은 좋아하던 녹턴 등을 뜨문뜨문 쳐보며 연명했지만
이곳에 온 순간, 그동안은 악기를 그만 하게 된 것이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 같았으나
아 내가 정말 악기를 다시 배우고 싶었구나, 하며 이제라도 시작한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비창' 악보를 샀는데 마침 이날의 프로그램에 비창이 있던 덕에,
프로그램의 두번째 곡은 악보를 보면서 감상할 수 있었다.
비록 레빗의 퍼포먼스가 더 재밌어서 두 가지를 동시에 보는게 힘들기도 했지만,
지난 여름 K향 공연을 보러 갔을 때 내 옆자리에 앉으신 분이 전공자신지
악보를 보면서 공연을 보는게 너무 멋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도 그것을 조금은 따라해보며 뿌듯하기도 했다ㅎㅎ
작년 2학기 즈음, 기말고사를 마친 뒤 '소울'이라는 영화로 수업을 했었다.
그 영화 초반 즈음에서 주인공 '조'와 '영혼 22'가 만나
육체와 영혼 사이의 공간인 '무아지경'의 세계를 탐험한다.
그러면서 그곳을 '뮤지션이 심취하면 들어오는 곳'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날 관찰한 그 표정과 몸짓을 통해 레빗은 연주를 하면서 그 세계에 들어간 듯한 모습을 보여줬고
그런 연주자와 그 순간을 같은 공간에서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 감사했다.

한편 그는 앵콜곡으로 '엘리제를 위하여'를 쳐주었는데
그래서인지 혹자에겐 심심한 프로그램에 단조로운 연주,라고 느껴질 수도 있었겠으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며 마음만은 초등학생 때의 그 시절로 돌아갔던 나에게는,
학원에 딱 한 대 있던 그랜드 피아노로 처음 쳐 본 곡이 그 곡이었기에
그 앵콜마저 마음 속 열정을 활활 타오르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