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클래식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사이먼 래틀 지휘, 조성진 협연)

리베쿤스트 2023. 2. 6. 17:25
일시: 2022년 10월 12일 목요일 19:30
장소: 대전예술의전당
좌석: 1층 F열 17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 사이먼 래틀
협연: 조성진 (피아노)
-프로그램-

라벨, 오케스트라를 위한 무용시 '라 발스'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작품 43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 마장조, 작품 107

 

이 날은 정말로 역사적인 날이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꿈 꾸던 삶의 '모양'은

어떤 대학에 가고, 어떤 직업을 갖고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어릴적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통해서 알게 된 여러 음악가들 처럼

계속 예술을 하면서 전세계로 '음악 여행'을 다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음악 전공을 못하게 되면서,

그리고 그 후에는 이 일, 저 일 해보고 또 결국엔 공부를 오래 하느라,

그러다 딱 30이 되어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탈리아로 떠났지만

그 해 말 바로 터진 코로나로 인해 내 발목은 몇 년간 계속 이 땅에 묶여있었다.

한창 이 '꿈'을 '꾸기만' 하면서 내가 했던 일 중에 하나는

한국에서도 공연을 열심히 보러 다니는 한편, '언젠가는 꼭 가리'라고 다짐하며

메가박스 클래식소사이어티에서 언젠가부터 상영해주던

빈 필과 베를린 필의 신년음악회를 챙겨보는 것이었다.

 

빈필&베필 2018-2019

그러던 중 2018년에 만났던 베를린필의 지휘자가 사이먼 래틀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부터 독일어를 배우며 독일을 비롯

같은 언어권인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등은 내가 언젠가 가보는 것이 당연(?)했기에

'와 독일에 가서 꼭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필을 봐야겠다!'라고 생각했었다.

(이 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베를린필을 본 것인데, 그 날의 지휘가자 사이먼래틀이었다.

빈필은 오래전부터의 버킷이었기에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계속 챙겨봤다♥️)

하지만 그 후 래틀은 런던심포니로 옮겼고,

그 때 베를린필을 지켜보며 그의 '유쾌한' 지휘가 맘에 들었었기에

'아 이제는 그를 보려면 런던으로 가야하나?' 라고 생각하던 중,

런던심포니의 내한 공연은, 거기다 베필에서 놓쳤던 그가 다시 독일로 적을 옮기기 전

마지막으로 런던심포니와 합을 맞추는 공연이 대전까지 온다는 것은,

또 덤으로 협연자가 조성진이라는 것은,

공연장 앞에서라도 밤을 새우며 표를 구하고 싶게 했다.

 

티켓팅에 대한 보답(?)으로 L선생님께서 사주신 만찬ㅎㅎ 그 후 카페를 갔는데 거기서 뒤적거린 잡지에도 래틀 경이 나왔다♥️

그런 내 간절함 덕분이었는지 나는 표를 두 장이나 구할 수 있었고,

한 장의 표는 같이 갈만한 사람에게 넘기고 싶었는데,

마침 L선생님께서 서울에서 대전까지 와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시며 선뜻 호응해 주셨다.

거기다 10월 12일은 모의고사 날이었기에 조퇴를 하기에도 무리가 없어

나는 2시 XX분에 룰루랄라 퇴근을 하여 서울에서 오시는 L쌤을 만나러 갔다.

지금까지 대전예당에서 공연을 많이 봤지만

이 날의 예당은 정말 사람이 많았고, 야외 상영까지 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트홀 역시 꽉 찼는데, 그 와중 내 왼쪽 옆 두 자리는 비어 편하고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또 이 날 F구역에 처음으로 앉아봤는데,

생각보다 무대와 거리가 가까워 연주자들의 표정과 손놀림을 보는데도 무리가 없고

무대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 매우 만족스러웠다.

 

대전 예술의전당 F열 17번 시야

이 공연의 포문은 라벨의 ‘라 발스’가 열었다.

‘Valse’는 프랑스어로 ‘왈츠’인데

처음 이 곡을 듣고는 ‘왈츠’하면 슈트라우스의 정돈되고 가지런한 곡들을 떠올렸기에 제멋대로 터져나오는 듯한 각 악기군의 멜로디를 들으며 ‘이게 무슨 왈츠야?’ 싶었다.

하지만 그 후 이 곡이 쓰인 시기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임을 알게 되었고, 여기에는 전쟁 직후 옛 영광이 자취를 감춘 빈이 투영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선지 이 곡을 들을 때면 춤곡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마냥 신나지만은 않고 조금은 쓸쓸했다. 그러니 이날 런던심포니의 연주를 들으면서는 ‘아 이 곡이 이래서 왈츠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어느새 곡에서 느끼곤 했던 쓸쓸함은 멀끔히 사라진 채 기대감만이 나를 채우게 되었다.

 

나도 찍어보았다, 머리 휘날리는 샷!

두 번째로는 어느새 무대에 피아노가 올려지고

그동안 유튜브로만 수없이 만났던 조성진이 등장했다!

그는 이날 런심과 함께 파가니니 랩소디를 연주했는데, 나는 웬만한 공연장에서 그래도 숨은 쉬지만 적어도 이 날 만큼은 행여나 내 숨소리도 공연에 방해될까봐 숨을 참고 봤다!

총 24개의 변주곡으로 이루어진 파가니니 랩소디에서 18번은 워낙 유명하기에 논외로 하고, 나는 ‘협주곡’에 걸맞게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겨루는 케미가 가장 잘 드러난 8-10번을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오늘은 그 겨루는 상대가 각각 조성진과 런던심포니였고 그래서 정말 누구를 감히 승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그래선지 마지막 변주곡으로 다가갈수록 그 시간이 너무나 아쉬웠고 24번에 무한정 도돌이표를 달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거기다 앵콜은 요즘에 꽂혀서 와 꼭 한 번 실황으로 듣고 싶다…고 생각했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니… 전날 대구 공연에서는 앵콜이 헨델의 곡이었다길래 전혀 기대를 못했는데, 조성진은 진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이 연주되었다.

브루크너는 그동안 익숙하지도 않고 마냥 어렵다고만 생각하여 가까이 하지 않았으나

지난 4월 교향악 축제를 통해 친해진 작곡가이다.

그 때 들은 4번 ‘로맨틱’이 목가적이고 유려한 선율로 복잡했던 내 마음을 위로해줬다면 이 날의 7번은 웅장하고 격정적인 사운드로 나를 조금 더 깊이있고 복잡한 교향곡의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나는 그동안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교향곡은 그 곡의 모티프가 된 문학작품의 스토리라인을 보거나 작곡가의 생애, 배경 등을 살펴 곡에 스토리를 입혀 이해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날 이 곡을 들으면서는 실체가 있는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가 여러 감정을 느끼듯 언뜻 ‘실체’가 없어보이는 선율 속에서도 많은 감정이 올라올 수 있는거구나, 사람들이 이래서 길고 거대한 교향곡에도 빠질 수 있는거구나 싶었다.

이 곡에서는 2악장을 가장 좋아하는데, 바그너의 죽음을 예감하고 쓴 곡이라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긴 하지만 나는 이걸 모르기 전에도 이 선율에서 '애달픈' 심정을 구구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때도 1시간 내내 귀로는 멜로디를 따라가고 눈으로는 오케스트라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숨죽일 수 밖에 없었는데 앵콜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앵콜까지 했으면 정말 산소부족으로 기절했을지도 모른다ㅎㅎ

 

사이먼 래틀과 런던심포니

한편 이 날 정말 재미있는 경험을 했는데

L선생님과 밥을 먹으며 ‘사이먼 래틀은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지휘자다’라고 했더니

역시 배우신 분(음악전공!) 이셔선지 자신이 사이먼래틀한테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게ㅋㅋ해 주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덕분에 아는 사람들만 아는 루트를 통해 연주자들 리허설 장소도 봐보고 (비록 잠겨있었지만!) 처음으로 공연 후 연주자들을 기다리며

편한 사복 차림의 연주자들의 퇴근길도 관찰하고 정말 짧은 스몰톡도 해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대구에서 대전으로 이어지는 일정, 또 다음날은 서울…로 인해 피곤해서인지

래틀이 돌연 출구를 바꿔 바로 차에 타는 바람에

얼굴도 잘 못 보고 사인과 사진은 이루지 못했지만 L쌤 덕분에 신기한 경험까지 하고 정말정말 만족스러운 연주회였다.

(TV에선 10대 여중고생들이 교복입고 운동화 신고 막 달리던데 나는 정장 입고 9cm 힐을 신고 뛰느라 힘들었다ㅜㅜㅋㅋ)

 

런던심포니의 퇴근길!

오늘 런던심포니를 필두로, 언제 이루나 망설이던 버킷리스트가,

이탈리아 하나 다녀와서 벌써 멈춰야 하는건가 했던 그 리스트가,

어느덧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좋은 일, 좋은 날들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