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클래식

정명훈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리베쿤스트 2023. 2. 6. 15:34
일시: 2022년 10월 6일 목요일
장소: 대전 예술의전당
좌석: 1층 C열 16
지휘: 정명훈
대전시립교향악단
대전시립합창단, 전주시립합창단, 당진시립합창단
-프로그램-

베토벤, 교향곡 제9번 라단조, 작품125 '합창'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연말이면 어김없이 연주되는 사골 느낌의 레퍼토리이다.

또한 독일어를 공부하면서 유튜브로 수도 없이 들었던 곡인데,

한 번도 실황으로 연주를 들은 적이 없었다.

또한 정명훈님 역시 세계적인 지휘자긴 하시지만

그 분이 피아니스트로 더 활발하게 활동하시던 시절,

희미한 기억 속 어린 때에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쫄래쫄래 따라갔던

어느 연주회에서 한 번 뵙고난 후로 무대 위에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흔하지만(?) 나에게는 인연이 허락되지 않았던 곡과 지휘자를

그것도 코 앞의 대전 예술의 전당에서 동시에 만난다는 기대감에

티켓오픈 때 부터 자리를 선점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맡아보는 고3 담임이었기에 2학기가 되자 예상치 못했던 폭풍근무가 이어졌고,

연말에 독일여행을 계획하며 틸레만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합창'을 예매해뒀기에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마침 근무도 잡혔는데 양도할까? 하는 고민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러나 오가는 길에 종종 합창을 들으며

'베토벤으로 하여금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도

결국엔 이 곡을 완성하게 한 동력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고,

어떤 분께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합창은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해주셔서,

결국엔 근무를 바꾸고 대전예당으로 향하게 되었다.

 

대전예술의전당 1층 C열 16번 시야. 드디어 합창, 그리고 어른이 되어 만나는 정명훈님이었다! ​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은 베토벤 최후의 교향곡이자,

모든 교향곡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그는 22살부터 이 곡의 작곡 구상을 시작하여 32년의 세월이 지난 후 이 곡을 완성해낸다.

(이 곡의 시작부터 완성까지 32년이 걸린 것은 아니다.)

당시 22살의 파릇한 청년이던 베토벤은 우연히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를 접하고

그에 깊이 감동해 이에 대한 주제로 곡을 작곡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그 때의 그는 교향곡을 단 한 번도 작곡하지 않은 시기였기에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한동안 그 마음을 접었다고 한다.

그러다 무려 25년이 지난 후 어느덧 중년의 노련한 작곡가가 되었을 때,

(8번 교향곡 작곡 후) 다음 교향곡을 쓸 때는 쉴러의 시를 접목하고자 마음 먹었고,

작곡의 스케치를 완성한다.

하지만 그 전부터 베토벤의 청력은 상실되고 있었고,

이 시기에 동생 카스파가 지병으로 죽었으며

카스파의 아들 양육권 문제 때문에 그간 하고 있던 다른 작곡 의뢰도 밀려지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합창은 그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교향곡에 독창과 합창을 접목시키는 곡이었기에

곡의 완성이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런 일화를 접하며

대체 무엇이 베토벤으로 하여금 4,50대가 되어

20대 때 접었던 꿈을 결국엔 이루도록 만들었을까?가 궁금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여러가지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 '너무 늦어버렸다'거나 '그냥 어릴 적 치기일 뿐이다'라고 체념했을텐데,

베토벤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 꿈을 결국에 이뤄내고자 했을까? 싶었다.

 

정명훈님! 이제 이 분이 날 공연에 데려가주시던 당시의 외할아버지같은 모습이 되셨다. 그래선지 외할아버지랑 같이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기도 했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연주회가 끝나고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예술작품이 그렇지만 일단 '합창'은 더더욱 유튜브로는 들을 수 없는 악기음들이 있었고

실제 공연장에서 듣는 사운드에 입체감이 상당했다.

더욱이 4악장이 시작할 때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심정이 되었는데

나중에 천국에 가서 혹시 무슨 음성이 들린다면 저런 멜로디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환희의 송가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사는

'Deine Zauber binden wieder, Was die Mode streng geteilt'

(신성한 그대의 힘은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다시 결합시키고)인데,

이날따라 왠지 이 가사가 더 다가왔고 나도 모르게 조용히 맘속으로 읊조리며

여기에 내가 찾던 궁금증들의 답이 있지 않나 싶었다.

 

훌륭한 공연을 보여주신 바리톤, 테너,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

베토벤은 '악성'으로 불릴만큼 매우 훌륭한 음악가이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을 놓고 보면 너무나 불행했다.

삶에서 많은 고난이 있었고,

더군다나 자신이 평생 바쳐온 업이 음악가인데 귀가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느꼈던 절망감은 감히 아무도 상상할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런 가혹한 상황 속에서 '해체'되었을 것이지만

베토벤은 어떤 '신성한 힘(독일어를 직역하면 '당신의 마법'이다)'에 의해서 더 단단히 '결합'되었고,

이 합창교향곡을 통해 그는 그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까 이 교향곡은

어린 시절 망설이면서 본인에게서 떨어져 나갔던 '환희의 송가'를 접목시킨 교향곡을 완성하겠다는 꿈이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마침내 완성된 결과물임과 동시에,

아무리 가혹한 현실이 지배하는 가운데서도 삶이 계속될 수 있음을,

오히려 그 가운데 더 단단히 결합해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인 것이다.

 

나 역시도 어린 시절에,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도 많은 꿈을 꿨다.

하지만 그 시기에 망설여서 놓친 꿈들도 있고

이제 지금 와서는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되어

다시 꿈꾸기가 두려워지는 꿈들도 있다.

그러나 만약 베토벤이 나처럼 생각했다면

과연 9번 교향곡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올 한해, 삶이 내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흐르며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또 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정말 살고 싶었던 삶’이 다시 고개를 들고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아직은 아니라며 마음의 문을 노크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합창’을 예습하며 항상 머리를 맴돌던 궁금증인데

이날 실황을 들으며

나에게도 베토벤, 그리고 그 이전에 쉴러에게 다가왔던 ‘Deine Zauber’,

그 마법이 임하는 순간을 기대하고 바라게 되었다.

비록 프로그램이 딱 이 한 곡에

앵콜도 환희의 송가 중 일부만 잠깐 들었지만,

만약 포기했다면 정말 후회했을 법한 공연이었다.